머리 크고 내가 경험 몇 차례의 대선 가운데, 가장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다. 내일 모레 투표일이지만 아직까지 결과를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초박빙이다. 그러나 내 기억으로 1997년, 2002년도 모두 박빙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독재의 후예, 잔당들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독재의 생물학적/정치적 계승자가 나왔으니 역사는 쉽게 발전하지 못 하는 가보다.


내가 이번 대선이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다고 느끼는 것은 오히려 독재자의 딸의 등장보다 진보정당의 사분오열과 민주당에 대한 맹목적 지지로 제대로 목소리를 못 내고 있어서일 게다. 1997년부터 조직된 세력으로 참여했던 노동계가 이번 선거에선 온데 간데 없다. 일부 명망가들은 문재인 쪽으로, 또 일부는 안철수 쪽으로 갔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5년 전에 분열했고, 그나마 원조 민주노동당은 올해 또 분열했다. 덕분에(?) 진보신당도 분열해 말 그대로 사분오열된 상태다. 분열보다 더 큰 문제는 독자적 노동자정당/진보정당 방향으로 가던 길을 바꿔서 노골적인 계급협조주의로 빠졌다는 것이다. 1997년 IMF 위기 때 50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절박함에서도 꿇지 않았는데, 2002년 '이회창만은 안 된다'는 정서에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민주당과는 다른 독자적인 진보정당 노선을 이제는 너무 당연하게도 내팽개친다. 심상정은 출마도 안 하고 문재인을 지지하는 굴욕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뻔뻔하게도 출마 한 이정희는 선전하다가 (누구나 예상했듯이) 문재인을 지지하며 사퇴했다. 언제부터 야권연대가 어쩔 수 없는 타협이 아닌 미덕이 됐고, 진보정당 후보들은 민주당 후보의 들러리가 됐다.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이상규 후보가 한명숙 선거 운동을 하며 춤 추고 다니던 모습은 깊은 충격이었다. 물론 김소연, 김순자가 고군분투하며 진보적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조직된 노동자 세력의 지지없이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이게 진짜 더 큰 문제이고,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보다도 훨씬 더 큰 문제다. 진보정당의 독자성은 15년 전에 비해 더 후퇴했다. 적어도 이 측면에서 역사가 더 후퇴했단 것이다.


사회 진보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이 상황 자체가 매우 가슴 아플 것이다. 박근혜가 유력한 대선 후보라는 사실이 믿고 싶지 않을 정도다. 어떻게 이룩한 민주주의인데 말인가. 박근혜 5년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명박 5년도 이리 끔찍한 데 박근혜 5년이라니. 그렇지만 난 노무현 5년도 끔찍했다. 최악이 되는 것보다 차악이 되면 좋을 것이다. 막상 12월 19일 오후 6시 출구 조사 발표에서 문재인이 당선됐다 하면 진심으로 기쁜 마음에 술 마시며 즐거운 밤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술이 깨면 알 것이다. 이제 차악의 5년 생활을 해야 한다고. 좌회전 깜빡이 키고 우회전 하는. 결국 투표는 우리 삶을 바꾸지 못 한다. 우리 스스로의 힘에 달렸다. 


박근혜, 문재인 누가 되든, 땀 흘려 일하는 모든 사람은 힘든 5년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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