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라탱고는 30년이 넘어가는 밴드니, 내가 말을 배우기 전부터 기타치고 노래하던 분들이다. 얼터너티브락, 인디락, 모던락, 슈게이징 그 뭐라 칭하든 이들은 이들만의 독특한 느낌이 있고, 한 번도 광범위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적은 없어도 컬트적인 인기는 항상 있었다.


나 역시 90년 대 중반부터 이들의 음반을 꾸준히 들으며 좋아했다. 이미 그때부터 이들의 <painful>, <I can hear the heart beating as one> 앨범은 소위 말하는 명반 대열에 올라 있었다. 


공연은 quiet set과 loud set으로 나눠 진행됐다. 쉬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3시간이 넘었다. 최근에 나온 곡뿐 아니라 90년대와 2000년대에 나온 곡들도 골고루 연주했다. 오랫만에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공연을 보고 두 가지를 깨달았다. 1.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도 키 큰 사람이 많아 스탠딩 공연은 앞으로 가지 말아야 겠다. 2. 장시간 서 있는게 다리가 너무 아파 스탠딩 공연은 앞으로 가지 말아야 겠다. 두 가지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어쨌든 결론은 하나다. 


그래도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내와 함께 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참, 이들의 공연 소식을 공연 이틀 전 출근하면서 읽는 신문에서 봤다. 원래 문화, 스포츠란은 거의 보지 않는데 그날 따라 구석에 코딱지만한 공연 기사를 읽어서 알게 됐다. 올해 가장 운 좋은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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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를 보면 참 일관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미국 노동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로저와 나>, 그건 아마 자신의 출신 배경에 따른 형제 자매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자들의 위선을 들춰내는 촌철살인 능력(<화씨 911>), 잔인하기 짝이 없는 미국 사회에 대한 고발(<볼링 포 콜롬바인>, <식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 등등.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매년 2달의 유급 휴가와 13월의 월급이 보장되는 이탈리아, 패스트푸드와 콜라가 없는 프랑스의 급식, 대학 무상교육을 하는 슬로베니아, 과거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성하고 후대에 가르치는 독일, 범죄자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노르웨이, 숙제가 없는 핀란드. 미국인인 마이클 무어에겐 천국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은 데모하면 물대포로 반 죽여놓고(백남기 농민은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다), 노동조합 총연맹의 위원장은 당선되면 반드시 구속하고, 제1의 진보정당은 해산시키고, 북한과 똑같이 역사를 국정교과서로 가르치고, 돈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입을 틀어 막고,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사드를 배치하고, 북한에 대한 압박 일변도로 북핵 실험을 초래하고. 지옥이 실존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누구는 얘기할 것이다. 한국은 저런 복지를 할 돈이 없다고. 기업들의 실적도 안 좋고 어쩌고 저쩌고. 그러나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다. 영화에 나온 것처럼 미국 노동자들은 유럽 노동자들보다 직접세는 적게 낼 지언정, 그외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의료비와 교육비가 어마어마하다. 이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요즘 들어 다시 주목받는 허경영의 황당무계하다고 평가밨던 공약, 즉 출산하면 3천 만원씩 지급하겠다는 것. 지난 10년간 한국 정부가 저출산 대책을 위해 투여한 돈이 150조다.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의 수가 450만 명이다. 3천 만원씩 주고도 10조가 넘게 남는 것이다. 허경영의 말처럼 예산이 부족한 게 아니다. 국가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우병우, 진경준, 조윤선, 홍만표 등 한국의 슈퍼 엘리트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만 봐도 희극인 같은 그의 지적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저 천국같은 나라들의 모습이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탈리아에서 오토바이를 만드는 노동자의 말처럼 이는 그 윗 세대 노동자들이 싸워서 쟁취해 낸 복지이고, 지금도 그것을 유지하려 싸우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한국 노동자와 미국 노동자도 할 수 있다. 단결해서 싸우면 가능하다. 경제를 마비시키고 나라가 절단 나도록 싸우면 가능하다. 박상영의 외침처럼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럴 부는 이미 충분히 있다. 아니 차고 넘친다.




아 참,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은 세계 첫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아이슬란드를 소개하면서 그 이후 수도 없이 많은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고 소개하는 장면에 박근혜가 나온 것이다.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일지언정 박근혜 정부 하에서 여성의 삶은 그 어느때보다 힘들다. 여성 혐오가 더 광범위하게 퍼지게 됐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는 치마 두른 남성, 마초다. 뼈 속까지 독재와 권위주의가 아로새겨져있다. 그를 소개하는 것은 영화 취지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즐거운 추석 연휴에 재밌게 영화 보다가 구역질 나서 짜증이 머리 끝까지 솓구쳤다. 


이번 영화를 보니 마이클 무어가 더 살이 찐 것 같은데, 건강 오래 유지하고 좋은 작품 많이 만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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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EBS에서 방영된 <공부의 배신>이라는 프로그램은 최근 들어 본 다큐멘터리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었다. 부모의 소득과 직업, 사는 지역, 아파트 가격과 자녀의 수능 성적이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심한 줄은. 그리고 그 모습을 눈으로 생생히 보니 너무 놀라웠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매 입시철이면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훈훈한 미담(?)이 신문에 소개되곤 했다. 그러면서 '노력하면 된다'는 신화를 부축이고 불합리한 이 사회가 나름 공평하다고 선전하는 근거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제는 그 누구도 그 따위 얘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가 없다. 그냥 개천에서 용 쓰는 거다.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지옥같은 입시를 경험했다. 그 어린 마음에도 나는 세상은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적어도 입시, 교육에 한해서는). 왜냐하면 내 부모님 세대는 중학교, 고등학교 입시를 거친 세대였지만, 나는 고교 입시가 없어진 고교평준화의 혜택을 누린 세대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 자식 세대는 대학평준화까지는 아니어도 입시 경쟁이 완화될 거라 믿었고 그렇게 희망했다. 그러나 내가 입시를 경험한지 20여년이 지나 이제 내 자식이 태어날 즈음의 상황을 보니 나아지기는커녕 경쟁이 훨씬 더 악화됐다. 


우선 고교평준화가 사실상 붕괴했다. 물론 내가 중학생일 때도 외고, 과고는 존재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수도 적었고, 극소수의 학생들만이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온갖 종류의 특목고가 난립하고 자사고까지 생겼다. 중학교 성적 상위 50%만 지원할 수 있는 자사고의 존재는 이미 1등 고등학교와 2등 고등학교를 나누는 것이다. 또 입시를 위한 경쟁을 시작하는 연령이 훨씬 내려갔다. 나는 중학생 때 맨날 하던 일이 자전거 타고, 친구들과 잠자리 잡으러 다니는 것이었다. 굳이 내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때는 다 그렇게 놀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가서 야자도 하고 학원도 다니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초등학교, 아니 그 이전부터 입시를 준비한다니 끔찍한 현실에 숨이 막혀온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다 보면 온갖 공익(?) 광고들이 난무한다. 무슨 60년대 미개한 국민들을 계몽한다는 정권도 아니고 가랑이 벌리고 앉지 마라, 임산부 석은 비워놔라(임신 초기에는 외형으로 임신 여부를 알 수 없다), 사람이 내리고 타라 등등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들을 하루 종일 하고 있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보면 알겠지만 가랑이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놈들, 임산부에 앉은 남자, 내리기도 전에 밀고 들어오는 아줌마 천지다. 다 큰 사람들이 기본적인 상식과 매너, 공중도덕이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거는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거다. 무슨 초딩들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영어 가르치고 함수를 가르치나. 초딩들은 그냥 땅따먹기하고 구슬 치기하고 고무줄하면서 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살아가려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예의 범절과 에티켓을 배우며 남들과 어떻게 친해지고 어울리는지를 배우는 거다. 그때 병신 같은 교육을 받고 어륀지니 이 지랄하고 있으니 몸뚱아리는 다 큰데 하는 짓은 애같은 인간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때부터 옆의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배우는게 아니라 옆의 친구를 짓밟고 올라가야지 자기가 성공하는 것을 몸으로 배우기 때문에 구급차가 지나가도 양보를 하지 않고 뻔뻔히 자기 갈 길 가는 놈들 천지인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날 애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너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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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난 고1이었다. 당시 얼터너티브록 혹은 모던록, 인디록 그 뭐라 부르든 그런 거에 심취해 있었다. 쥐똥만큼 받는 용돈과 야자 때 먹으라고 받은 식비를 모아서 난 음반을 샀다. 물론 한국에 수입되지 않는 음반들이기에 (지금은 사라진) musicboulevard.com, cdnow.com 등에서 사서 들었다. 지금처럼 (한국이나 미국이나) 인터넷이 발달된 때가 아니기에 (당시는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의 시대였다) 정보는 주로 잡지를 통해 얻었다. 미국 혹은 영국의 인디씬에 대해 알려주는 국내 잡지가 당연히 없어서 나는 타워레코드에서 수입하는 잡지를 사 보았다. 보통 spin, cmj, alternative press, Q 등을 매달 혹은 한 달 걸러 사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쳤지 싶을 정도로 밥 굶어 가며 음악을 들었던 때다.


80년대 말 시애틀에서 태동한 그런지록은 빠르게 언더그라운드씬에서 주류가 됐고, 기성 질서에 저항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너바나, 펄잼, 사운드가든 등등. 참고로 너바나의 1집이 나왔던 subpop이라는 시애틀의 인디 레이블은 자신들의 20주년을 기념해 시애틀의 크래프트브루어리 elysian과 loser라는 페일에일을 콜라보로 만들었다. 병 라벨에는 corporate beer still sucks라는 다분히 인디적인 문구도 있고. 아이러니하게 elysian은 최근 AB Inbev에게 매각돼 비어긱스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는데, 언더그라운드에서 인기를 얻던 뮤지션이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는 순간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개까이는 상황하고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어쨌든 한쪽에서는 그런지를 필두로 소위 '얼터너티브록'이 대세가 됐고, 또 한쪽에서는 oasis, blur, pulp 등 영국 밴드들의 인기로 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는 상황이 됐다. 벨앤세바스찬이 데뷔했을 때의 상황이 어쨌든 이랬다는 것이다. 


벨앤세바스찬의 1996년 데뷔앨범 (사실 데뷔할 생각이기 보다는 그냥 친구들과 냈는데 대박이 난 것) tigermilk는 lp로 1천 장만 발매해 이미 당시부터 전설이 되었다. 마치 맥덕들에게 CBS나 MD, KBBS가 발매되자마자 전설이 된 것처럼. 당시에는 mp3도 없었고 인터넷도 (거의) 없었던 시절이므로 대중들에게 이들의 사실상 데뷔앨범은 2집 If you're feeling sinister다. 포크적인 감성이 잘 묻어있고, 지극히 서정적인 가사 아름다운 멜로디의 이 앨범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명반이다. 당시 매일 밤 10시까지 야자하면서 수십 번, 수백 번 씨디를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침에 졸린 눈으로 등교할 때도, 쉬는 시간에도, 야자할 때도, 집에 돌아 갈 때도 이 앨범을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난 고3이 됐고, 그때 나온 그들의 3집 The boy with the arab strap 역시나 당시 엄청나게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힘든 고등학생 시절 항상 옆에 있으면서 나를 위로해주고, 용기를 준 친구같은 밴드고 앨범이다. 대학생이 되면 일본이나 미국에 가서 꼭 그들의 공연을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난 대학에 갔고 내 관심사는 모던록에서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 갔지만, 그들의 앨범이 나오면 항상 pre-order를 걸어 놓고 샀다. 그들의 티도 계속 입었고, 그들의 싱글, DVD도 모조리 샀다. 그러나 천천히 그들에 대한 관심은 줄어 들었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이런저런 소식은 들었다. 내가 복학한 이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전력을 다할 때, 영국에서 그들이 반전 콘서트에 참가하며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예술은 예술가의 정치 성향과 별개인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도, 난 진정한 예술가라면 전쟁 반대 같은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운 상황에서 진정으로 인간의 창조성과 예술이 발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을 처음 안 지 19년이 지났고, 이제는 수지타산이 남을 정도가 됐는지 한국에서 공연도 잡혔다. 공연은 당연히 아주 좋았다. 특히 더 좋았던 것은 초창기 앨범에서 많은 곡을 연주했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곡이 4개 정도 나왔는데 아마 지난 달에 낸 새 앨범에 수록된 곡 같다. 초창기 곡들에 비하면 상당히 싸이키델릭하고 훵키하고 댄써블한 면을 많이 강조한 것 같다. 그들의 이런 변화된 모습도 좋다. 예전의 나였으면 배신이고 변절이고 어쩌고 저쩌고 했을 텐데 (마치 U2가 디스코텍을 내놨을 때 팬들이 게거품 문 것처럼) 세월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고 좋다고 생각한다. 


공연장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왠지 다 옛 친구들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그들에게 가장 심취했고 의지했던 90년대 말의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 대학 친구 부부도 우연히 만났다! 이런 우연이 있을 때 삶은 더욱 재밌는 것 같다. 요즘 너도나도 90년대 추억팔이를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잘못된 만남>과 <배반의 장미>가 있다면 나에게는 <If you're feeling sinister>와 <The boy with the arab strap>이 있는 것이다. 이게 어제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점이다. 19년 전으로 여행을 간 느낌. 그때 내 감정, 내 고민, 주변 풍경, 공기, 그 atmosphere. 10년 후, 20년 후, 40년 후에도 이런 기회를 통해 옛 생각을 하며 웃음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3번째 애니버서리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험을 했다. 






최근 E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는 동물 관련 프로그램 가운데 보기 드물게 수준있고 잘 만들었다. 대개 관련 프로들은 흥미를 유발할 만한 기이한 사연이나 자극적인 영상 혹은 의인화를 통한 감정이입 등으로 점철(!)돼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서로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결여돼 있는 게 보통이다.


특히 난 이 노골적인 제목이 마음에 든다. 괜히 돌려 말하지 않고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게. 좋은게 좋은 거지 따위의 뜨뜨미지근한 게 아니라 강렬하게 꽂히는 돌직구. 내가 만나는 수많은 보호자 가운데 상당수에게는 내가 바로 해주고픈 말, 그러나 불필요한 오해와 상처를 주고 vet-client bond를 깰 수 있어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말, 하루에도 몇 차례는 목구녕까지 차 오르는 말.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 


개를 입양해서 키운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매일 산책을 시켜 줘야 하고, 놀아 줘야 하고, 밥과 신선한 물도 챙겨 줘야 한다. 변도 치워 줘야 하고 오줌도 닦어 줘야 한다. 다른 사람, 다른 동물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어릴 때 사회화 교육을 시켜줘야 하고, 매너 교육도 필요하다. 정기적인 예방접종과 심장사상충을 비롯한 기생충 예방약도 투여 해야 한다. 중성화 수술도 꼭 시켜줘야 하고 나이들면 생기는 온갖 병들에 대해서도 적절한 치료를 해줘야 한다. 이처럼 많은 시간, 귀찮음, 열정, 돈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기간은 대개 15년 이상이다.


물론 개는 애가 아니지만, 이 세상 어떤 누구도 즉흥적으로 애를 갖지는 않는다(간혹 그런 사람도 있지만 대개 후회한다). 애를 갖으려면 미리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그것을 설계한다. 어떤 누구도 애를 집안에만 가둬 놓지 않는다. 똥오줌을 못 가린다고 혼내고 때리지 않는다. 가릴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킨다. 사회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정규 교육과정도 밟게 하고 필요하면 학원도 보낸다.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아프지 않아도 꼬박꼬박 예방접종을 시킨다. 하지만 개는? 그냥 집에 데려와서 사료하고 물만 주면 잘 살 것이라 생각하나? 내가 보호자한테 자주 하는 말은 "애 키우는 데 들어가는 노력의 천분의 일만 들이면 아주 훌륭한 개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개는 쇼 윈도에 있는 예쁜 가방이 아니다. 숨을 쉬고 변을 보며 짖기도 하고 말썽도 피우는 동물이다. 매일매일 산책하면서 다른 동물 냄새 맡는 것을 좋아하는 생명체다. 각각 개성도 다 틀리다. 이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매일 집에만 가두고 산책도 안 시키고 관리도 안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취급을 당하는 개들은 마음의 병을 얻는다. 때 맞춰 접종하고 사상충 예방을 한다고 애가 건강한 게 아니다. 마음은 썩어 문들어져 있다. 그래서 필요 없이 짖고, 집안 물건을 물어 뜯고, 대소변을 아무데나 싸고, 사람을 물고..등등. 이는 개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만든 보호자의 잘못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보호자도 개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알지 못 했으므로 누구의 잘못도 아닐 수 있다.


어쨌든 이런 프로그램이 너무 반갑고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계몽주의적인 것은 정말 밥맛이지만, 대한민국의 반려견 문화는 너무 후지기 때문에 이런 계몽이 너무나도 절실하다. 


지금 옆에 개가 있다면, 나는 진정 개를 키워도 되는지, 그 개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 그 개때문에 나 역시나 행복한지 한 번 생각해 보라. 신문에 실린 한 인기 수의사의 칼럼처럼 고맙다고 말하며 폭풍 포옹을 하지는 마라. 그것은 분리불안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신 평소에 스스로 무료함을 느끼지 않게 다양한 environmental enrichment를 해라. 그게 폭풍 포옹보다 개가 훨씬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만, 이 프로를 보고 죄책감을 갖지는 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이 개를 키우기에 충분히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그 개를 포기해선 안 된다. 그것은 죄악이고, 그 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것이다. 처한 상황에서 개가 최대한 행복하게, 그럼으로서 사람도 함께 행복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2013


내가 대학에 들어갔던 90년대 말은 애매한 시기였던 것 같다. 90년대 초반까지는 80년 광주와 87년 항쟁의 여파로 학생운동의 영향력이 학내를 압도했고, 학생들 역시나 변혁적 사상(그것이 친소든 친북이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었음이 분명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는 이미 신자유주의적 세계관과 질서가 캠퍼스를 압도했기 때문에, 토익/텝스/어학연수/학점/스펙/취직 같은 것 이외에는 설 자리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동아리(특히 스펙과 관련없는 문학, 서예 같은)도 사치, 젊음도 사치, 낭만도 사치, 연애도 사치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 취직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치가 됐다. 90년대 말 학번들은 딱 그 중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군에 가기 전 대학생활 2년 동안은 아침마다 운동권들이 하는 정문 앞 선전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연말 학생회 선거 때마다 정파마다 출마를 해서 경선이 이뤄졌다. 반면 제대하고 복학한 후 4년 동안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장 극명하게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첫 2년 동안은 대낮에도 본관 앞 잔디밭에서 술을 마시는 학생들을 왕왕 볼 수 있었지만, 복학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단순하고 인상적인 경험만으로도 경쟁이 대학생들을 짓누르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386 사람들(30년 대생, 80대, 6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박근혜 정부의 386이 아니다)이 술 자리에서 '나 때는 대학생들이 어땠는데' 따위의 푸념이나, '20대 개새끼론' (아마 노회찬이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한 후였던 것 같다) 같은 다분히 감정에 치우친 냉소만이 있었지, 20대 대학생들의 고민을 심층적으로 추적한 기획은 흔치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촛불에 나온 학생들이 쌍용차 파업에는 비난을 하는 등 소위 '진보'적 사회 쟁점에서 다분히 모순적이고 엇갈리는 생각을 갖는 학생들의 모순된 의식을 들추려 했다. 이미 나도 대학을 졸업한지 꽤 돼서 요즘 대학생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해서 재미있게 봤다. 아니 사실 흥미로웠지 재밌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민과 그들이 매일매일 받을 스트레스(취업, 학벌 등)를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대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경쟁을 기반으로 하고 한국은 몇몇 극단적인 요소를 더 추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쟁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만, 오랜 기간 억압적인 중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아주 잠시나마 맛보는 대학생활의 해방감마저도 요즘 젊은이들은 제대로, 온전히 누리지 못 한다는 것에 가슴이 아려온다. 현실은 비루해도 온갖 상상으로도 행복한 나이일진데..


그런 의미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얘기는 정말 쓰레기 같다. 어떤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이 비정한 현실을 정당화 하기 때문이다. 이는 노인네한테 "늙으니까 죽는다", 환자한테 "아프니까 환자다" 따위의 얘기를 하는 것과 똑같다.  


참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대학에 갈때면(모교이든 아니든) 학생들이 멋대가리 하나 없는 야구 점퍼를 입는다. 젊을 수록 개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강하기 마련인데, 하나같이, 정말 천편일률적으로 야구 점퍼를 입는 모습은 그야말로 기이하지 않을 수 없다. (상위에 랭크된) 자신의 학교 이름을 자랑하고픈 욕구가 그런 멋대가리 없는 야구 점퍼를 입게 만든 원동력이라는 것만 봐도 한국이 얼마나 중증의 병을 앓고 있는 사회인지 알 수 있다.  


난 보지 않았지만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고 한다(물론 이 책에서 재인용한다).


오동철: 너 아직도 노냐?

한세진: 예? 노는 게 아니라.....

오동철: 요새, 취직하기도 힘들다는데....불황 아니냐, 불황.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해요.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프랑스 백수 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지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아휴~ 새끼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야! 너도 너 욕하고 그러지 마. 취직 안 된다고. 니탓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살어! 힘내 씨발!


진정으로 맞다. 실패와 낙오의 원인을 모두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가리고 해법을 잘못 제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다시 재기의 기회조차 없는 이 사회는 정말 악질적이다. 개인이 못나서가 아니다. 그 개인의 능력과 잠재력을 한낱 시험점수 하나로 재단하고 평가하고 줄 세우는 병적인 사회 때문인 것이다.


천안함 프로젝트, 감독 백승우, 2013


과학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그것이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말이다. 특히 우리네가 사는 세상은 진공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온갖 잡다한 요소들이 과학적 연구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본 등등.


아, 한국처럼 상당히 독특하고 특별히 후진 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인맥 같은 그야말로 전근대적인 요소도. 


나는 이런 것들이 한국 과학 발전, 학문 발전,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 발전에 굉장히 큰 걸림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러한 예는 정말 너무 많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업계'만해도 한국 과학계에 가장 큰 스캔들이었던 황우석 사태, 내가 수업들었던 모교 교수가 총대 메고 정부의 나팔수를 자처했던 광우병 사태가 있다. 이렇게 유명한 일 외에도 대학(원)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정과 비리는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정부가 이런 일에 앞장 서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수질 개선을 외치며 4대강 사업을 벌인 것을 들 수 있다. 결과는 어찌 됐는가. 4대강 곳곳이 녹차라떼로 변해 죽은 강이 됐다. 


'4대강 살리기'의 결과. 4대강을 이렇게 죽이고 살리겠다는 건가?


천안함 사태도 마찬 가지다. 온갖 관변 학자들을 동원해 혹세무민을 저지른다. 정부 발표에 대한 합리적 의심, 건전한 비판은 모두 '종북 빨갱이'의 근거가 된다. 


이석기 사건 이후 어찌나 '종북몰이'가 심한지 이제는 기명 칼럼을 쓰는 왠만한 사람은 모두 서두를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이라 시작한다. 광기 어린 사상 검증 몰이에 자신은 온건한 사람임을 고백하지 않으면 글도 못 쓰는 야만적인 사회가 돼버렸다. 


정부 발표에 반하는 내용을 말하면 '빨갱이'가 되는 사회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그 존재만으로도 침묵을 강요받는 많은 사람에게 속 시원한 것이다.


북한군 어뢰에 의해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정부의 발표는 너무 허술해 굳이 하나하나 반박할 가치도 없다. 그냥 유튜브에 가서 어뢰 폭발 관련된 셀 수도 없이 많은 동영상 가운데 하나만 보면 된다. 그 영상만으로도 천안함 침몰 이유 가운데 어뢰 폭발은 rule out시킬 수 있다.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가운데 하나다. 이것을 통제하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 퇴행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지금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믿으라 한다. 침묵하라 한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들이 믿게 된다. 

-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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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감독 봉준호, 2013


사실 봉준호의 전작들과는 많이 다르다. 예의 그 빈틈없는 꼼꼼함도 많이 헐거워진 느낌이고, 봉준호식 상업성이 아닌 헐리우드식 상업성이란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매우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현실을 매우 잘 다루고 있다. 이 얘기는 아주 노골적으로 계급적인 영화라는 것이다(봉준호 감독이 이를 부정하든 아니든). 


기차에는 호사스런 삶을 누리는 소수와 차별과 억압, 멸시를 받는 다수로 나뉘어져 있다. 다수는 그 소수의 시중을 들며 그들을 위해 일한다. 소수는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무장대를 만들어 다수를 감시하고 억압한다. 어린 아이들은 이 기차가 절대 진리라고 배운다. 기차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나가려고 시도하면 죽는다고 배운다. 


기차를 체제로 치환하면 얼마나 우리네 모습과 똑같은지 알 것이다. 


날이 갈수록 먹고 살기 힘들고, 부정부패와 불의가 판치는, 희망이 사라진 이 시대는 가진 것 없은 이들의 반란을 다룬 이 영화가 흥행가도를 달리게끔 해준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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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했더니, 고 어린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아.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제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들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지슬, 감독 오멸, 2013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벌어진 민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다룬 영화이다. 당시 제주도민 30만 명 가운데 10%인 3만 명이 학살됐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실제 사망자 수는 알 수가 없어 8만 명(인구의 25%가 넘는다)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당시 정부군이 파악한 무장대 수는 최대 5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 극악무도한 '빨갱이'를 잡아 죽인다는 명목하에 그 60배가 넘는 양민을 죽여 버렸다. 사망자의 30% 이상이 여성, 10세 이하 어린이, 60세 이상 노인이었다. 


친일파를 기반으로 한 이승만은 이 '빨갱이 사냥'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려 했고, 미국은 이를 '레드 헌트'라 부르며 지원했다. 


이 영화는 3만 명이라는 비현실적 숫자에 하나 하나 생명감을 불어 넣는다. 그 한 명 한 명이 모두 순박한 사람들이었고, 평생 열심히 일만 해 온 정직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 모두는 누구의 사랑스런 자식, 누구의 자랑스런 부모, 누구의 둘도 없는 배우자였다는 것. 그런 소중한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죽임을 당했고, 그 수가 수 만 명에 이른다.


이런 영화가 소위 대박이 나야 한다. 모든 국민들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처참한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12년 행정안전부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60%가 6.25의 발발연도를 모른다. 하물며 4.3 사건은 어찌 알겠는가. 


이는 정부가 제대로 역사 교육을 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한 문제다. 이미 십 수년 전에 내가 고등학생일 때도, 현대사는 거의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단군 할아버지와 구석기 시대는 그렇게 많은 비중을 할애하면서, 정작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지금 이 시점의 역사는 하찮게 여겼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국사가 아예 수학능력시험에서 선택 과목이 됐고, 2012년도 응시자 가운데 고작 6.9%만이 국사를 선택했다. 


이러면서 정부가 무슨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비난하는가. 


이런 현실 때문에 영화를 본 후 가슴이 먹먹한 느낌이 쉬 가시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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