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난 고1이었다. 당시 얼터너티브록 혹은 모던록, 인디록 그 뭐라 부르든 그런 거에 심취해 있었다. 쥐똥만큼 받는 용돈과 야자 때 먹으라고 받은 식비를 모아서 난 음반을 샀다. 물론 한국에 수입되지 않는 음반들이기에 (지금은 사라진) musicboulevard.com, cdnow.com 등에서 사서 들었다. 지금처럼 (한국이나 미국이나) 인터넷이 발달된 때가 아니기에 (당시는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의 시대였다) 정보는 주로 잡지를 통해 얻었다. 미국 혹은 영국의 인디씬에 대해 알려주는 국내 잡지가 당연히 없어서 나는 타워레코드에서 수입하는 잡지를 사 보았다. 보통 spin, cmj, alternative press, Q 등을 매달 혹은 한 달 걸러 사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쳤지 싶을 정도로 밥 굶어 가며 음악을 들었던 때다.
80년대 말 시애틀에서 태동한 그런지록은 빠르게 언더그라운드씬에서 주류가 됐고, 기성 질서에 저항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됐다. 너바나, 펄잼, 사운드가든 등등. 참고로 너바나의 1집이 나왔던 subpop이라는 시애틀의 인디 레이블은 자신들의 20주년을 기념해 시애틀의 크래프트브루어리 elysian과 loser라는 페일에일을 콜라보로 만들었다. 병 라벨에는 corporate beer still sucks라는 다분히 인디적인 문구도 있고. 아이러니하게 elysian은 최근 AB Inbev에게 매각돼 비어긱스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는데, 언더그라운드에서 인기를 얻던 뮤지션이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는 순간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개까이는 상황하고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어쨌든 한쪽에서는 그런지를 필두로 소위 '얼터너티브록'이 대세가 됐고, 또 한쪽에서는 oasis, blur, pulp 등 영국 밴드들의 인기로 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리는 상황이 됐다. 벨앤세바스찬이 데뷔했을 때의 상황이 어쨌든 이랬다는 것이다.
벨앤세바스찬의 1996년 데뷔앨범 (사실 데뷔할 생각이기 보다는 그냥 친구들과 냈는데 대박이 난 것) tigermilk는 lp로 1천 장만 발매해 이미 당시부터 전설이 되었다. 마치 맥덕들에게 CBS나 MD, KBBS가 발매되자마자 전설이 된 것처럼. 당시에는 mp3도 없었고 인터넷도 (거의) 없었던 시절이므로 대중들에게 이들의 사실상 데뷔앨범은 2집 If you're feeling sinister다. 포크적인 감성이 잘 묻어있고, 지극히 서정적인 가사 아름다운 멜로디의 이 앨범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명반이다. 당시 매일 밤 10시까지 야자하면서 수십 번, 수백 번 씨디를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침에 졸린 눈으로 등교할 때도, 쉬는 시간에도, 야자할 때도, 집에 돌아 갈 때도 이 앨범을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난 고3이 됐고, 그때 나온 그들의 3집 The boy with the arab strap 역시나 당시 엄청나게 좋아했다. 어떻게 보면 힘든 고등학생 시절 항상 옆에 있으면서 나를 위로해주고, 용기를 준 친구같은 밴드고 앨범이다. 대학생이 되면 일본이나 미국에 가서 꼭 그들의 공연을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난 대학에 갔고 내 관심사는 모던록에서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 갔지만, 그들의 앨범이 나오면 항상 pre-order를 걸어 놓고 샀다. 그들의 티도 계속 입었고, 그들의 싱글, DVD도 모조리 샀다. 그러나 천천히 그들에 대한 관심은 줄어 들었다. 그러나 중간중간에 이런저런 소식은 들었다. 내가 복학한 이후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전력을 다할 때, 영국에서 그들이 반전 콘서트에 참가하며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예술은 예술가의 정치 성향과 별개인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도, 난 진정한 예술가라면 전쟁 반대 같은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운 상황에서 진정으로 인간의 창조성과 예술이 발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을 처음 안 지 19년이 지났고, 이제는 수지타산이 남을 정도가 됐는지 한국에서 공연도 잡혔다. 공연은 당연히 아주 좋았다. 특히 더 좋았던 것은 초창기 앨범에서 많은 곡을 연주했다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곡이 4개 정도 나왔는데 아마 지난 달에 낸 새 앨범에 수록된 곡 같다. 초창기 곡들에 비하면 상당히 싸이키델릭하고 훵키하고 댄써블한 면을 많이 강조한 것 같다. 그들의 이런 변화된 모습도 좋다. 예전의 나였으면 배신이고 변절이고 어쩌고 저쩌고 했을 텐데 (마치 U2가 디스코텍을 내놨을 때 팬들이 게거품 문 것처럼) 세월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고 좋다고 생각한다.
공연장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왠지 다 옛 친구들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그들에게 가장 심취했고 의지했던 90년대 말의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 대학 친구 부부도 우연히 만났다! 이런 우연이 있을 때 삶은 더욱 재밌는 것 같다. 요즘 너도나도 90년대 추억팔이를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잘못된 만남>과 <배반의 장미>가 있다면 나에게는 <If you're feeling sinister>와 <The boy with the arab strap>이 있는 것이다. 이게 어제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점이다. 19년 전으로 여행을 간 느낌. 그때 내 감정, 내 고민, 주변 풍경, 공기, 그 atmosphere. 10년 후, 20년 후, 40년 후에도 이런 기회를 통해 옛 생각을 하며 웃음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3번째 애니버서리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험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