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an River Pliny the Elder, 8%


아 덥다. 아 맛있다.


얘는 좀 할 말이 있다. 원래 반골 기질이 좀 있어서 사람들이 막 좋다고 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타입인데다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극강의 맥주라 여겨지던 트라피스트들도 한국에 정식 소개되면서 접근성도 좋아지고 또, 최근에 벨기에 다녀오면서 1유로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리는 시메이, 베스트말레 등을 손 쉽게 경험하니. 뭐랄까 예전에 외국에서 겨우 구해와서 신주단지 모시듯이 있다가 기념할 만한 좋은 날에 목욕재개하고 온갖 집중해서 한 모금 한 모금 마셨을 때보다 다소 실망스러웠다. 여전히 맛있고 훌륭한 맥주임에는 분명하지만, 뭐랄까, 내 머리 속에 각인된 천상의, 극강의, 그런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얘는 정말 명불허전이다. 괜히 미국 맥덕들이 몇 해 연짱으로 최고의 맥주로 이 녀석을 꼽는 게 아니다. 호피한 아로마부터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고, 도수에 비해 터무니 없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자몽, 귤, 오렌지의 맛이 입안 쫙쫙 감기면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정말 깔끔한 떨어지는 피니쉬. 괜히 명성이 자자한 게 아니다. 병입된지 한 달이 채 안 된 녀석인데, 증말 소우우우우 후레쉬.


원래 맥주를 천천히 마시는 편인데, 러샨리버 브루펍에서 플라이니를 한 잔 시키고 빈 속임에도 10분 만에 벌컥벌컥 비웠다. 너무 맛있어서. 정말 신선했고, 아로마와 훌레이버가 좋았다. 무엇보다도 드링커빌리티, 그냥 목젖을 타고 술술 넘어 간다. 


그러나 플라이니의 진짜 진가는 그 다음 날 알았다. 계속 다시 러샨리버 브루펍에 가서 플라이니를 한 잔 더 하고 싶었다. 일정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알지만 서도, 어떻게 해서든 다시 가서 탭으로 한 잔. '죽기 전에 다시는 올 수 없을 텐데' 뭐 이런 생각을 하며. 마시는 상상만으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참 내 몸이 그렇게 원하는 것을 보면서 진짜 훌륭한 맥주라는 것을 느꼈다. 


원래 어떤 분야든 덕후들에게는 희소성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녀석(뿐 아니라 러샨리버 다른 맥주들)은 구하기가 보통 힘든게 아니다. 생산되는 캘리포니아를 제외하곤 콜로라도, 오레곤, 필라델피아 주에만 공급된다. 그나마 작년에는 워싱턴 주에 공급했다가 올해부터 중단하면서 워싱턴 주 덕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그 즈음 재밌게 읽은 칼럼이 '플라이니 (워싱턴 주) 공급 중단 이후에는 무슨 IPA를 마셔야 하나'로 마냥 웃어 넘기기에는 심각했다). 


그렇다고 공급되는 지역에서도 손 쉽게 구할 수 있는게 아니다. 몇몇 보틀샵에만 공급하고 그나마 들어오는 것도 인당 구입 병수를 제한해도 몇 시간 안에 동나 버린다. 이 녀석 말고도 베스트블레테른에 맥덕들이 열광하는 이유에는 그 희소성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물론 원체 훌륭한 것도 있지만 말이다. 


러샨리버가 플라이니 생산을 대폭 늘리면서 접근성이 좋아진다면 지금같은 열광적인 인기는 끌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녀석이 매우 훌륭한 맥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에겐.


http://russianriverbrewing.com/brews/pliny-the-el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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