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연합뉴스>
2012년 12월 19일
난 그날 무엇을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심지어 그때 내 감정의 기복까지 세세히. 사실 그 전날부터 밤잠을 못 이뤘다. 문재인을 단 한 순간도 지지한 적 없고 실제로 문재인에 표를 주지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강경 우익 정부가 5년 연장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도 설마설마하며 박근혜의 패배를 확신했다. 당일 날 일을 했다. 바쁘진 않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6시 투표 시간이 끝나자마자 나온 출구 조사를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설마설마했다. 술을 마시며 개표를 봤다. 표차는 점점 역전하기 힘들 때까지 벌어졌다.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다. 그날 밤은 아마도 내가 태어나서 욕지거리를 가장 많이 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늦게까지 욕을 하니 머리가 띵했다.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아침에 배달된 신문 1면을 보고서야 실감했고, 앞으로의 5년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멘탈이 붕괴된 상태에서 회복하는 데는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2014년 4월 16일
난 그날 무엇을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침부터 점심, 오후, 저녁, 밤까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뉴스에 따라 요동치는 감정까지 생생하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슴이 아려서 뉴스를 끝까지 못 보고, 밥 먹다 말고 먹먹해지고, 길을 걷다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아니 도대체 그날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박근혜가 그날 미용 시술을 받았는지, 누구와 모처에서 밀회를 즐겼는지, 그냥 낮잠을 처잤는지 끝까지 못 밝혀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사실 만으로도 하나 확실한 건 박근혜가 애들이 죽어가는지, 구조가 제대로 되는지에 대해서 아아아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난 박근혜가 뭐 특별한 것을 했다고 생각치 않는다. 그냥 안방에서 뒹굴 거리며 아무것도 안 한 것이다. 그러다가 밑에서 닦달하니까 뒤늦게 주섬주섬 챙겨서 중대본에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온 국민은 박근혜와 이 사회 권력자들의 쌩얼을 봤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경찰을 동원해 세월호 유가족의 시위를 막고, 국정원을 동원해 종북몰이를 하고, 일베와 어버이들을 동원해 유가족들을 조롱하고, 보수 언론을 동원해 유가족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동원해 세월호 특별법을 누더기로 만들고, 행정부 각 기관을 동원해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방해했다. 그들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인간의 탈을 쓴 짐승 새끼들이었다. 그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조직하고 지원하고 동원한 게 박근혜다.
2017년 3월 10일
난 오늘 무엇을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전날 부터 왠지 모를 초조, 불안 증세가 몰려왔다. 오전에 일어났을 때 극에 달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헌재 선고 생중계를 봤다. 불과 몇 해 전 통합진보당을 강제 해산하며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던 반동의 보루, 헌법의 파괴자인 헌법재판소의 손에 민주주의를 다시 맡겨야 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반동의 보루마저 만장일치로 탄핵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박근혜의 죄는 명명백백했고, 사실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박근혜가 쫓겨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박근혜를 끌어내린 우리 민중의 힘만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오늘은 맛있는 술을 마시며 찐하게 즐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럴 자격이 있다. 특히 오늘의 결정이 지난 1천일 넘는 시간 동안 고통 받았을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을 억만 분의 일이라도 달래줬기를 바란다. 삶의 어느 날이 안 그러겠냐만 오늘은 특히 먼저 간 자식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규명되고 박근혜를 비롯한 책임자들이 그 죄값을 받을 때 우리는 짐승의 시대에서 사람의 시대로 전환하는 첫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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