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2013
내가 대학에 들어갔던 90년대 말은 애매한 시기였던 것 같다. 90년대 초반까지는 80년 광주와 87년 항쟁의 여파로 학생운동의 영향력이 학내를 압도했고, 학생들 역시나 변혁적 사상(그것이 친소든 친북이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었음이 분명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는 이미 신자유주의적 세계관과 질서가 캠퍼스를 압도했기 때문에, 토익/텝스/어학연수/학점/스펙/취직 같은 것 이외에는 설 자리가 없었다. 이들에게는 동아리(특히 스펙과 관련없는 문학, 서예 같은)도 사치, 젊음도 사치, 낭만도 사치, 연애도 사치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 취직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치가 됐다. 90년대 말 학번들은 딱 그 중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군에 가기 전 대학생활 2년 동안은 아침마다 운동권들이 하는 정문 앞 선전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연말 학생회 선거 때마다 정파마다 출마를 해서 경선이 이뤄졌다. 반면 제대하고 복학한 후 4년 동안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장 극명하게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첫 2년 동안은 대낮에도 본관 앞 잔디밭에서 술을 마시는 학생들을 왕왕 볼 수 있었지만, 복학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단순하고 인상적인 경험만으로도 경쟁이 대학생들을 짓누르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386 사람들(30년 대생, 80대, 6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박근혜 정부의 386이 아니다)이 술 자리에서 '나 때는 대학생들이 어땠는데' 따위의 푸념이나, '20대 개새끼론' (아마 노회찬이 2008년 총선에서 낙선한 후였던 것 같다) 같은 다분히 감정에 치우친 냉소만이 있었지, 20대 대학생들의 고민을 심층적으로 추적한 기획은 흔치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촛불에 나온 학생들이 쌍용차 파업에는 비난을 하는 등 소위 '진보'적 사회 쟁점에서 다분히 모순적이고 엇갈리는 생각을 갖는 학생들의 모순된 의식을 들추려 했다. 이미 나도 대학을 졸업한지 꽤 돼서 요즘 대학생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해서 재미있게 봤다. 아니 사실 흥미로웠지 재밌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민과 그들이 매일매일 받을 스트레스(취업, 학벌 등)를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대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경쟁을 기반으로 하고 한국은 몇몇 극단적인 요소를 더 추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경쟁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만, 오랜 기간 억압적인 중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아주 잠시나마 맛보는 대학생활의 해방감마저도 요즘 젊은이들은 제대로, 온전히 누리지 못 한다는 것에 가슴이 아려온다. 현실은 비루해도 온갖 상상으로도 행복한 나이일진데..
그런 의미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얘기는 정말 쓰레기 같다. 어떤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이 비정한 현실을 정당화 하기 때문이다. 이는 노인네한테 "늙으니까 죽는다", 환자한테 "아프니까 환자다" 따위의 얘기를 하는 것과 똑같다.
참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대학에 갈때면(모교이든 아니든) 학생들이 멋대가리 하나 없는 야구 점퍼를 입는다. 젊을 수록 개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강하기 마련인데, 하나같이, 정말 천편일률적으로 야구 점퍼를 입는 모습은 그야말로 기이하지 않을 수 없다. (상위에 랭크된) 자신의 학교 이름을 자랑하고픈 욕구가 그런 멋대가리 없는 야구 점퍼를 입게 만든 원동력이라는 것만 봐도 한국이 얼마나 중증의 병을 앓고 있는 사회인지 알 수 있다.
난 보지 않았지만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고 한다(물론 이 책에서 재인용한다).
오동철: 너 아직도 노냐?
한세진: 예? 노는 게 아니라.....
오동철: 요새, 취직하기도 힘들다는데....불황 아니냐, 불황.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착해요.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프랑스 백수 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개지랄을 떨던데,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지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아휴~ 새끼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야! 너도 너 욕하고 그러지 마. 취직 안 된다고. 니탓이 아니니까. 당당하게 살어! 힘내 씨발!
진정으로 맞다. 실패와 낙오의 원인을 모두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가리고 해법을 잘못 제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다시 재기의 기회조차 없는 이 사회는 정말 악질적이다. 개인이 못나서가 아니다. 그 개인의 능력과 잠재력을 한낱 시험점수 하나로 재단하고 평가하고 줄 세우는 병적인 사회 때문인 것이다.
'문화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Belle and Sebastian Live in Seoul (0) | 2015.02.13 |
---|---|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 (2) | 2014.03.09 |
천안함 프로젝트 - 국민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나라 (0) | 2013.10.07 |
설국열차 - 어쩜 우리네 모습과 똑같을까 (0) | 2013.08.11 |
그날 (0) | 2013.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