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 감독 정지영, 2012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있었던 김근태에 대한 고문을 다룬 영화다. 감독은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이다. 배우도 상당히 겹친다. 박원상, 이경영, 문성근 등.
영화는 상당히 비장하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그럴 수 밖에 없다. 흡사 다큐멘터리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인간임을 포기한 고문 기술자와 그가 벌이는 야수적 능욕을 아주 잘 그렸다. <부러진 화살>처럼 현실의 소재를 훌륭히 영화해 했다. <부러진 화살>의 유일한 아쉬움이 박원상의 오버스런 캐릭터였다면 <남영동 1985>는 그런 아쉬움도 없다. 특히 문성근과 이경영의 담담한 연기는 인상쓰고 소리지르고 화내는, 전형적인 악역의 캐릭터를 포기해도 충분히 그 맛(?)을 살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좋은 소재를 제대로 영화하지 못 한 영화가 많은데, 좋은 소재의 좋은 영화다.
이런 영화를 천 만 관객이 봐야 한다.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비극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또 지금의 이 형편없는 민주주의 조차도 수많은 민주주의 투사와 민중의 힘으로 이뤄졌음을.
한국 현대사에서 자행된 고문과 야만은 위 책에 잘 서술돼 있다. 지금은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의 역작이다.
다음은 1985년 12월 19일 김근태가 한 법정 진술이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어지러운 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 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 차례, 13일.....13일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그 다음에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 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 합니다.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 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의 주범, 옥사했음)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너가 복수를 해라" 이러한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인 능룍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 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자면 깔아 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방청석 통곡).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 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뤘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는 자 중의 한 사람은 - 이름을 밝히지 않겠지만 -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로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